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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칼럼] 성희롱 예방교육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고? (여미정 프로듀서)

작성자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작성일
2021-04-29 19:06
조회
368

성희롱 예방교육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고?

여미정 프로듀서

나는 영화 스크립터로 시작해 지금은 기획과 작가를 겸하고 있는 26년차 영화인이면서 4년차에 접어든 영화계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다. 여성학 관련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00 평론가는 왜 매번 영화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분석하나’ 같은 푸념도 했던 내가 어쩌다 예방교육 강사를 하게 됐을까. 그 계기는 남동생에게 보여줬던 한 장의 사진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화장실 문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무슨 사진 같냐’는 내 질문에 남동생은 그것이 화장실 문이라는 것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남자화장실 문은 구멍이 뚫린 적도 별로 없고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 사진을 여성에게 보여주면 거의 백프로 여자화장실 문이라는 답변을 얻었다. 불법촬영카메라가 없던 시절부터 구멍 숭숭 뚫린 화장실 문을 익숙하게 봤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사진을 보여줬던 당시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이 일상에서 받고 있는 위협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입 밖으로 말하던 시기였다. 그때의 나도 술자리에서 남성감독에게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두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인가에 대해 열변을 토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남자도 밤에 다니는 거 무서워’ 라는 공감하지 못하는 얘기 뿐이었기에 지난한 싸움에 지친 나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었다.

이 일로 느낀 건 내가 다른 사람을 설득할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여성의 삶과 일상에서의 성폭력 위협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2017년 하반기쯤 영화진흥위원회는 영화계 성폭력 근절을 위해 지원사업 대상자에게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고 영화인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를 양성하면서 나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영화 100년사에 처음으로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실태조사 설문에 응답한 749명 중 46%가 ‘성희롱·성폭력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고 답했다. 직접 경험한 영화인 중 여성이 61.5%, 남성이 17.2%로 응답했다. 미리 짐작했음에도 놀라운 수치였다.

성폭력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성별 비교)



2018년 3월,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출범하여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신고 및 상담과 피해자 지원,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등 성평등한 영화계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앞선 칼럼(한국영화는 성평등한가?)에서 언급되었듯이 영화 현장이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 정책연구로 확인이 되었으며 영화진흥위원회는 다양성 확보를 목표로 2021년 지원사업에 성평등지수를 도입하여 여성인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정책 방안도 마련했다.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얘기로 돌아가면 2017년에 이어 2020년에 실태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가 최근 발표되었다. 834명을 대상으로 ‘성희롱·성폭력 직접 피해 경험’을 묻는 질문에 58.3%가 응답하였고, 이 수치는 2017년보다 10%가 늘었다.

성폭력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전체)



영화계가 예방교육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 피해 경험이 상승했다는 수치는 우리의 노력이 다 무용지물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응답을 종합 분석해 본 결과는 달랐다. 예방교육을 실시한 최근 2년 동안의 직접 피해경험 응답은 36%로 훨씬 줄어들었다. 그럼 58.3%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전에는 자신이 겪은 일이 성폭력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는데 그간의 예방교육 등을 통해 성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특히, 이 수치는 남성에게서 높게 나왔는데 2017년 17.2%에서 2020년 37.9%로 상당히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짓궂은 장난쯤으로 치부되어 기분 나빠도 말하지 못했던 일들이 성희롱·성폭력이었음을 남성도 분명히 인식하게 됐다고 분석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희롱 예방교육이 영화계의 성폭력을 완전히 뿌리 뽑지는 못하고 있지만 무엇이 성폭력인지를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조금의 효과는 있었다고 자부해본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거니까.

든든의 예방교육 강사로서 강의 경험이 많아 이제는 단단해졌다 싶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도대체 이런 강의는 왜 들어야 하는 거야?’ 라는 시선에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움츠려든다. (매일 이런 시선과 싸우고 있는 모든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에게 파이팅을 외쳐본다!) 그러나 매번 적대적 눈빛과 싸우면서도 강의를 이어나가는 이유는 교육을 통해 조금씩 인식이 변화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불어 예방교육을 들으면서 너무 필요한 강의를 잘 들었다고 감사한 눈빛을 보내주시는 모든 영화인에게 제가 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덕분에 저도 강의하면서 엄청 힘이 났어요!)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영화인들이 있기에 성평등한 영화계를 만드는 우리의 노력도 계속될 것이다. 영화인으로서, 관객으로서, 그리고 보다 공정한 사회를 원하는 시민으로서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해줄 것을 바라며 칼럼을 마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6년 5월 17일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화장실에 숨어서 기다리다 살해한 사건. 앞서 화장실을 드나들었던 6명의 남성은 살인의 표적이 되지 않고 나중에 들어온 20대 여성이 살해된 점, 가해자가 여성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보인 점 등을 토대로 해당 사건이 ‘여성 혐오 범죄’라는 의견이 있었다.


여미정  프로듀서

기획/각색했던 영화 ‘부당거래’가 10년 전의 일이니 개봉 맛을 본 지 한참된 영화기획자.
코로나 때문에 영화크랭크인이 미뤄지면서, 잠시 OTT드라마 작가로 활동 중.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 3기 위원으로 재임 중.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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