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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칼럼] 성평등, 다양성 그리고 능력주의의 허상 (조혜영 영화평론가)

작성자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작성일
2021-06-15 17:44
조회
620

성평등, 다양성 그리고 능력주의의 허상

조혜영 영화평론가

얼마 전 국내 최대 영화 커뮤니티로 알려진 사이트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성평등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올라와 논란이 되었다. 영진위는 한국영화에서 성평등을 실현하겠다는 목표 속에서 그 첫 단계로 주요 지원사업에서 성별균형을 맞추기 위한 새로운 심사기준을 도입한 바 있다. 그리고 2021년부터 지원사업 중 ‘기획개발·시나리오 공모 및 영화화연구·독립예술영화제작’ 분야의 심사기준에 ‘독창성과 참신성·완성도·영화화 가능성’(총점 100점) 외에 성평등 지수를 할당해 1점에서 최대 5점까지 가산점을 부여하고 있다. 논란이 된 게시물은 이러한 정책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며 게시자 본인이 영진위에 민원을 제기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곧이어 해당 글에 찬반 댓글이 달리면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났다. 그중에는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수상해 화제가 되기도 한 ‘미국 아카데미상’(이하 아카데미) 역시 작품상 심사에서 다양성 기준을 적용할 계획이며 성평등과 다양성의 포용전략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댓글이 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는 백인·남성중심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할리우드 영화산업 자체가 백인·남성중심적인 것도 있지만, 아카데미 후보작 선정에 대한 투표권을 갖고 있는 심사위원들 자체가 백인과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와 고정관념이 유지되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 집단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사회의 주류집단으로만 구성된 심사위원단과 그들이 갖고 있는 특권이 구조적 차별을 만들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것 자체가 심사의 ‘불공정성’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차별이 있다는 깨달음만으로는 이미 굳어진 구조화된 차별을 바꾸기는 힘들다. 구조화된 차별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에 맞설 만한 구조적인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뒤늦었지만 어느 정도 비판을 수용한 아카데미는 ‘서사 및 등장인물, 각 제작부서 책임자 및 제작현장 인적구성, 인턴십 등 교육과 기술 개발 기회, 홍보 및 투자배급 분야의 인적 대표성’에서 과소대표된 여성, 성소수자, 인종·민족, 장애인 집단이 적정 비율을 넘어야 작품상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다양성 기준을 도입하기로 했다. 사실 아카데미뿐 아니라 이미 칸, 베를린 등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국제영화제들이 감독 및 주연의 성별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선언을 했으며, 영국과 스웨덴 등의 영화진흥기구들은 카메라 앞과 뒤 그리고 관객문화 모두에서 성별균형을 포함한 다양성 기준을 통과해야 공적 지원금 지원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출처: Vanity Fair (2018)

다양한 창작자가 다양한 영화를 만든다

이에 대한 논쟁이 펼쳐지는 가운데 커뮤니티 운영자가 아카데미의 성평등 및 다양성 정책을 소개한 댓글을 편향적이고 불필요한 언급이라며 그 댓글을 게시한 회원을 강제로 탈퇴시키면서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커뮤니티 운영자는 공지를 통해 강제 탈퇴의 근거로 "성별 가산점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남성 감독이 만든 영화,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를 떠나서 영화 그 자체로 얘기하길 원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영화를 만든 주체는 성별과 같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당연히 창작에 정체성이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체성은 창작을 위한 관점과 영감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들 중 하나다. 다양한 캐릭터, 서사, 형식의 창작물이 나오려면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가진 창작자들이 있어야함은 물론이다.

한국을 비롯해 다수 국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감독의 성별과 서사를 주도하는 캐릭터의 성별이 동일한 비율이 평균적으로 70%이다. 여성 주도 서사를 많이 보고 싶다면 여성 감독이나 작가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양이 많아지면 그중 더 독창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경험을 탐색하고 표현하는 영화도 많아질 것이다. 한국의 경우, 2009-2018년 매해 흥행 50위에 포함된 극영화 약 450편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감독이 여성주연 영화를 만든 비율은 62%이고 남성감독이 남성주연 영화를 만든 비율은 69%이다. 7%의 차이는 남성주연 영화를 만들 때와 달리, 여성감독이 여성주연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거나 기획할 때 제작을 성사시키기 어렵게 만드는 높은 장벽이 있음을 말해준다(조혜영 외 <한국영화 성평등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대규모 제작비를 들인 (대개 남성감독과 남성주연인)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수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개봉을 미루면서, 역설적으로 저예산의 여성 감독 영화들이 극장개봉의 기회를 이전보다 많이 갖게 되었다. 이 이례적인 상황에서 여성 주연 영화는 여성감독과 남성감독 각각 71%와 35%로 상승했다(영진위 <2020년 한국영화산업결산>).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비율이 극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비정상 상황이 정상을 만든 것이다. 양적으로만 보면 바로 이 간극만큼 차별과 불균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믿는 능력주의가 틀린 이유

논란을 불러일으킨 본 글 게시자는 한국영화에 명시적 차별은 없다며 현 정책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공정’이란 단지 기계적으로 동일한 시험을 치루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험이나 심사는 걸러내고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능을 포용하고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거나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얻었다고 착각하는 자원이나 특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 배제되었던 다양한 조건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적절한 평가를 받기 위해선 그들을 환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에 맞는 새로운 심사기준을 세워야 한다.

차별은 때로는 차별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하게’ 그리고 ‘은연중에’ 일어난다. 심지어는 차별을 받는 집단에 소속된 당사자조차 ‘자신이나 소속 집단에 일어난 일이 정말로 차별일까’라고 고심하고 ‘차별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내가 약자나 소수자임을 인정하게 되어 그것이 나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하는 이 유가 되지 않을까’라고 불안해하며 주류 집단은 쏟을 필요 없는 에너지를 쓰게 되는 것, 그것이 때로는 현대사회 차별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 번 칼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 대학의 영상관련 학과에서 여학생의 성비가 50%를 넘은 것은 이미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아직도 “핵심 창작 직군인 제작·프로듀서·연출·각본·촬영 직군의 여성 비율은 모두 20%가 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여성들이 능력과 경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야말로 성차별주의자인 것이다.

이미 남성중심적으로 고착된 기존의 네트워크와 특정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은 하루아침에 개인들의 각성과 의지로만 변화할 수 없다. 차별이 구조화된 것임을 인지하고 우리 사회가 합의된 상식으로 성평등을 지향하면서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정책적 개입을 할 때 가능해진다. 특히 공공기관은 공익성을 목적으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할 의무가 있다. 본 글 게시자와 커뮤니티 운영자 모두 ‘능력주의’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음을 피력한다. “누구나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인 능력주의는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기만 한다면 평등한 사회라고 여긴다.”(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그러나 구조화된 불평등 속에서 만들어진 평가 체계와 기회 접근성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능력주의는 사회의 구조화된 불평등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며 은폐하는 데 사용될 뿐이지, 실제 능력이 있고 없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제 영화의 미래는 다양성에서 시작된다


넷플릭스 다양성과 포용 전략 보고서
출처: USC (2021), Netflix(2021)

최근 넷플릭스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로 자체 제작 작품과 채용에 대한 ‘다양성과 포용 전략’ 보고서를 출간하면서, 다양성 및 포용전략은 적절하고 공정하게 ‘재능’을 발굴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것임을 피력했다. 이 보고서는 그간 주류 영화에서 소외됐던 여성, 소수인종 및 민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이 영화에 비중 있게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넷플릭스 포용전략 책임자이자 부회장인 베르나 마이어스는 “사회적 소수자의 스크린 대표성이 담론을 바꾸고 세계를 즐겁게 할 수 있으며 더 많은 감정과 관점을 접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크린의 다양성은 카메라 뒤의 다양성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이러한 전략은 가능한 좋은 이야기, 좋은 재능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며, 폭 넓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글로벌 기업 전략이기도 하다. 넷플릭스는 그를 위해선, “첫째 당신이 놓쳤던 사람을 찾아라, 둘째 그들에게 매력적인 환경을 만들어라, 셋째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새로운 재능을 개발시켜라”라고 말한다. 다양성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포용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과 정책이 필요하다. 다양성을 얻으려면 기존에 배제되어온 창작자들이 각 영화산업, 영화사, 제작현장을 자기의 공간으로 편하게 느끼고 진입하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영진위는 "올바른 제도 안착을 위해 지속적으로 제도를 검토하고 위원회가 인지하지 못한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라며 제도 보완의 가능성도 열어뒀다. 이 방향은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성별균형 정책을 다른 지원사업에까지 확장하거나 혹은 지역 영상위원회, 영화산업노조, 그리고 상업영화까지 연계해 성평등을 실천할 컨센서스를 만드는 것으로 가야한다. 또한 양적 균형뿐만 아니라 질적인 관점에서의 평등을 위한 정책은 무엇이 효과적일지, 성별뿐만 아니라 다른 과소대표된 소수집단(장애인, 성소수자, 이민자, 소수민족 등)이 영화산업에 포용되기 위한 다양성 정책은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 다양성 리터리시를 위한 관객문화 조성은 어떻게 가능할지로 확대되어야 한다. 현재의 정책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점을 보완할 정책을 추가하고 예산 등을 확장해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마치 성평등과 다양성이 별개이거나 심지어는 대립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히려 성평등은 다양성의 일부이자 기반이다. 이미 차별적 구조에 있는 여성의 ‘파이’를 빼앗아 또 다른 차별적 구조에 있는 다른 사회적 소수집단에게 ‘파이’를 줄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방식은 차별받는 소수자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기득권의 반동적 실천이다. 이러한 수사는 실제로는 여성의 차별뿐 아니라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의 차별을 없애는 데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소수자들을 도구화 해 주류의 성차별에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제로섬 게임인 ‘파이 나누기‘의 상상력을 긴급하게 벗어나야 한다. 시공간이 제한된 상상력으로는 창조성을 얻을 수 없다.

영화감독 봉준호, 배우 윤여정, 영화감독 클로이 자오(Chloe Zhao) (왼쪽부터)
출처: Vulture (2020), SCMP (2021), Vanity Fair(2021)

영화 관계자뿐만 아니라 관객,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도 아카데미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을, 윤여정 배우가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에 열광했다. 그리고 중국 출신의 클로이 자오가 감독하고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주연한 ‘노마드랜드’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것에서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고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아카데미의 변화를 부러워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웨이브’가 불기 시작했다는 기사도 대중의 큰 관심을 얻고 있다. 과연 한국영화는 단순히 한류나 ‘K-000’를 넘어서 한국에서 ‘아카데미의 봉준호, 정이삭, 윤여정, 클로이 자오’ 같은 재능을 발굴하고 키울 시스템을 만들고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한 포용 전략은 무엇인가?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다양성을 말하고 원하는가?



조혜영 영화평론가

다수의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으며 <프로젝트38> 연구원으로 영화와 디지털 미학에 대한 글을 쓰고 가르치고 있다. 『한국영화성평등 정책수립을 위한 보고서』 책임연구를 맡았으며, 공저로 『원본 없는 판타지』, 『을들의 당나귀 귀』, 『소녀들: K-pop, 스크린, 광장』,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오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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