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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칼럼] 영화계 및 대학 영화과에서의 다양성 교육의 필요성 (김선아 단국대학교 공연영화학부 부교수)

작성자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작성일
2021-08-31 15:05
조회
189

영화계 및 대학 영화과에서의 다양성 교육의 필요성

김선아 단국대학교 공연영화학부 부교수

문화는 끊임없이 우리의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그 경험의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의미를 해석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탐험하고 삶을 구성해 나가게 된다. 영화 역시 유통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관객에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구조를 이해하고 상상하도록 돕는다. 이것이 문화의 힘, 영화의 힘이며 그 힘의 핵심부에는 결국 스토리가 있다. 스토리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창문이 되어주고, 나를 이해하고 내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지렛대이다. 스토리라는 지렛대의 힘을 빌려야만 우리는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의 이야기를 듣는가?’, ‘누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사실 권력의 문제이다.

나는 90년대 초반 영화산업에 들어와서 여러 작품의 프로듀서로 일을 했고 2012년부터는 대학원과 영화학부에서 영화교육을 하고 있다. 이런 경험에도 다양성이란 말은 내게 아직도 그 의미가 손에 분명히 잡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때로는 멀게 느껴진다.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양성이란 말과 만나는 경우는 이런 칼럼이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 보고서 같은 곳이 대부분이다. 가끔은 저예산이란 말과 혼동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양성 영화, 저예산 영화, 독립영화가 서로 겹쳐서 이해되는 식이다. 언제부터인가 예산이 일정 규모 이상인 주류영화, 메이저 영화와 비교적 저예산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의 다양성 영화는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분리됐다.

나는 주로 예산이 일정 수준 이상인 소위 메이저 영화 쪽에서 프로듀서로 일을 해왔다. 같이 일한 감독은 거의 남성이었고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와 열정, 실력을 모두 갖춘 분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돌이켜봐도 내게 영광이고 기쁜 일이 분명하다. 나는 그들이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서, 그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그들의 기억들과 경험에 대해서 들었다. 왜냐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영화 그 자체이기도 했으니까. 이야기 속 주인공인 남성 캐릭터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열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화자인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따라가야 했다. 나는 그 속에서 내가 메이저리티(Majority)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내가 일하는 곳은 예산이 큰 상업영화, 메이저 영화를 만드는 곳이었고 내가 만드는 영화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많은 부분 공감했지만, 사실 절반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들이 말하는 어떤 감정들, 경험들, 대사들, 장면들 그리고 노래들은 내 경험을 통해 해석되기 어려웠고 멀었고 낯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시나리오를 읽을 때 그리고 결국 영화를 볼 때 이해하는 척하며 나 자신을 속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긴 시간이 흘러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결국 나는 메이저리티의 세상 속의 마이너리티(Minority)였다는 걸 깨닫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좀 많이 무지해서 여성의 이야기,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주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별로 믿지 못했다. 내 생각에 그땐 다들 그랬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최근에도 여성 감독들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예산이 큰 영화를 잘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거나 좋은 시나리오라면 감독이나 주인공의 성별은 따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믿어지지 않지만 그렇다. 여성들은 긴 시간, 영화를 통해 자신의 주된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재생산하고, 구조화하고, 웃고, 농담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세상의 반이 여성임에도 영화산업에서 여성이 소수자, 마이너리티인 이유가 그것이다. 영화 속 여성의 이야기는 아직 발아 단계라서 어떤 사람들에겐 그것이 소소하고 불분명하고 낯설게 보인다. 그런데 거꾸로 내가 오래 전 프로듀서로 일하며 들었던 영화 속 남성의 이야기들이 내겐 가끔 소소하고 불분명하고 낯설었다. 남성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충분히 고민되고 말해졌다. 이젠 어쩌면 누군가에게 낯설고 때론 불분명할지라도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고, 귀 기울여야 할 때이다.

다양성과 소수자는 내게 동전의 앞 뒷면처럼 함께 붙어 있는 관계로 다가온다.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목소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인종과 피부색 등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지만 그것이 차별의 기준이어서는 안된다. 차별은 법이나 제도처럼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사회구조 안에서 보이지 않는 편견과 억압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편견과 억압구조는 보이지 않을수록 더 교묘하다. 어떨 때는 소수자에 속한 사람들조차 차별은 없다고 스스로 속아 넘어갈 만큼 짙고 어두운 무지의 구름으로 덮여 있다. 그런 만큼 자신이 주류에 속했다고 믿는 경우라면 아마 소수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함을 넘어 자기도 모르게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갖고 있기 쉽다.

나는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며 난감한 장면을 목격할 때가 몇 번 있었다. 여성 학생이 자신의 아이템을 피칭(Pitching)하고 평가를 받는 자리에서 주로 남성인 평가자(대개 교수나 심사자)들이 아이템 속 여성 주인공이 겪는 사건을 사소하거나 영화적 사건이 아니라는 식의 피드백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여성인 내게는 충분히 중요한 사건이고 시네마틱(cinematic)한 사건임에도 서로 그런 시선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대학 영화과의 경우 여성 학생의 비율이 50%에 도달한 것은 이미 십여 년 전의 일이지만 여성 교육자의 비율은 여전히 매우 낮다. 다른 영화교육기관 역시 남성 교육자가 대부분이며 성평등 정책 토론회 등에서는 이런 부분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매우 높다. 최근 학교에서 20대 초, 중반의 학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대의 흐름이 굉장히 빠르게 변화한다는 것을 느낀다. 20대 여성 학생들은 영화산업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매우 부족하다고 말한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내가 가르치는 20대 남성 학생들 역시 여성의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도 여성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들이 세상과 영화 모두에서 많은 변화를 원하고 기대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알고 싶은 그들의 요청과 열망에 부응하는 교육은 아직 미비한 것이 현실이다.

다양성이란 단어가 가진 건조함 뒤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만들고 경험을 재구조화하고 웃고 농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긴 시간 영화 속에 구축되어온 세상과 어딘가 달라서, 이런 건 특수한 거라, 사소해서, 낯설어서, 여러 이유로 기회의 제약을 받으며 발화되지 못한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이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무관심과 편견의 높은 벽을 깨고 서로를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류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소수자의 생각과 경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무관심, 고정관념, 편견으로 덮인 짙은 구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구름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바람이 필요하다. 다양성 교육은 상대를 타자화하는 건조하고 차가운 구름을 치워내기 위한 바람이다. 영화산업과 영화교육기관에서의 다양성 교육을 확대하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성 교육뿐만 아니라 다양성 영화에 대한 정책적 지원도 확대되어야 한다. 카메라 뒤의 다양성은 스크린 위의 다양성으로 이어진다. 창작자의 다양성 확대를 위한 지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김선아 단국대학교 공연영화학부 부교수 

영화 <어느날>(2016), <역도산>(2004), <지구를 지켜라!>(2003), <봄날은 간다>(2001) 등의 극영화와 VR film <동두천>(2017) 등 다양한 작품에서 프로듀서와 제작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공연영화학부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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